비발디, 안토니오 (1678-1741)   Antonio Vivaldi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의 최대의 작곡가

 

비발디는 1678년 3월 4일,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 밥티스타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유명한 성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그가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과정이 좀 특이하다. 조반니는 어릴 때 이발관에서 조수로 일했는데, 당시 이발관에서는 여러 가지 악기를 갖다 놓고 손님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악기를 연주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조수로 일하던 조반니는 손님들이 바이올린 켜는 것을 등 너머로 배워 35세 때 베네치아 성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1677년 조반니는 재봉사의 딸과 결혼했고 이듬해 첫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안토니오 비발디이다. 비발디는 7개월 만에 태어난 칠삭둥이로 건강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반니는 어린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직접 바이올린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작곡가 코렐리에게 작곡을 배우도록 했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실력은 일취월장해서 나중에 아버지와 함께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명바이올리니스트의 명단에 오를 정도였다.

비발디는 15살 때인 1673년부터 10년 동안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신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 10년 동안에도 집을 떠나지 않고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건강상의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유가 어쨌든 이것은 비발디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집에 머물며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틈날 때마다 성 마르코 대성당의 연주에도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03년, 비발디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 사제의 중요한 임무인 미사를 집전할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앓아 왔던 천식이 원인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미사를 집전하지 않는 신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또한 '빨강 머리 사제'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의 머리 색깔이 아버지를 닮아 빨강색이었기 때문이다.

사제의 임무로부터 해방된 비발디는 1703년 피에타 병원 부속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사가 되었다. 피에타 음악원은 고아나 사생아 출신의 소녀들을 데려다가 국비로 음악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이런 종류의 음악원이 네 군데 있었는데, 이곳에서 훈련받은 소녀들이 일요일이나 축제 때마다 교회에서 연주를 했다. 비발디는 매우 유능한 교사로, 소녀들로 구성된 악단이 뛰어난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훈련했다. 소녀들은 매우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이들의 연주는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피에타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일하던 처음 10년 동안, 비발디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12개의 트리오 소나타와 최초의 협주곡집 〈조화에의 영감〉을 비롯한 여러 곡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고향 베네치아는 물론, 멀리 암스테르담에서도 출판되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유럽 전역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유명 작곡가가 되었다.

1713년, 피에타 음악원의 최고 책임자 가스파리니가 자리에서 물러나자 비발디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바로 이 무렵 비발디는 오페라 작곡을 시작했다. 1714년에서 1718년까지 무려 10편이 넘는 오페라를 베네치아에서 공연했는데, 당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비발디의 모습은 오페라 흥행사 같은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오페라 공연 때문에 음악원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1713년에는 오페라 공연을 위해 피렌체를 방문했으며, 1720년부터 1723년까지 3년 동안 만토바에 머물며 3편이 넘는 오페라를 공연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오페라를 공연하기 위해 유럽의 거의 모든 도시를 방문했다.

1735년, 비발디는 피에타 음악원의 합주장에 임명되었으나 3년 후인 1738년에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운다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그럼에도 피에타 음악원과의 관계는 지속하고 있었다. 음악원의 오케스트라를 위해 협주곡을 작곡해 주고, 베네치아에 머물 때에는 리허설에도 참석하는 등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유명한 작곡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말년은 행복하지 않았다. 1739년 비발디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베네치아 청중이 그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 무렵 그는 자신의 협주곡 20곡을 헐값에 내놓았다. 하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빈민촌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타향에서 고생하다가 1741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객사했다. 그리고 빈곤자 신분으로 빈의 슈페탈 묘지에 매장되었다.

작곡가로서 비발디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코렐리와 알비노니가 개발한 독주협주곡 양식을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그의 협주곡은 신선한 선율과 활기찬 리듬, 독주와 오케스트라 음색의 능숙한 처리, 형식의 명료함을 특징으로 한다.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 약 350곡 정도 되는데, 그중 3분의 2는 바이올린을 위한 것이다.

비발디의 협주곡은 코렐리나 알비노니의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빠르고 느리고 빠른 3악장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악장의 취급법은 약간 다르다. 비발디는 느린 악장에 빠른 악장 못지않은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의 느린 악장은 아다지오로 된 오페라 아리아나 아리오소처럼 긴 호흡에 풍부한 표현력을 자랑하는 칸타빌레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크 시대에는 기악곡에 제목이나 해설을 붙이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비발디의 음악 중에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이 많다. 그 유명한 〈사계〉를 비롯해 〈바다의 폭풍〉, 〈즐거움〉, 〈밤〉, 〈귀염둥이〉, 〈의심〉, 〈불안〉, 〈안식〉, 〈애인〉 등이다. 특히 〈사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제목 외에 각 계절의 모습과 풍광을 묘사한 소네트(정형 서정시)를 붙여 '음(音)으로 그린 풍경화'를 만들었다.

제목이나 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묘사적인 기법을 사용한 것도 비발디 음악이 갖는 특징이다. 〈사계〉에 보면 이런 묘사적인 대목이 많이 나오는데, 비록 〈사계〉뿐만 아니라 제목이 붙은 그의 기악곡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런 묘사음악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낯선 개념이었다. 이렇게 추상적인 음악에 구체성을 부여하려는 비발디의 시도는 이후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비발디의 협주곡집 중에서 가장 먼저 발간된 것은 1711년에 출판된 〈조화에의 영감(Estro Armonico)〉이다. '조화에의 영감'이라는 말은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창조력을 발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협주곡집은 비발디가 피에타 음악원의 여학생들을 위해 작곡한 곡 중에서 특별히 엄선하여 뽑은 12곡을 모아 놓은 것이다. 따라서 12곡의 악기 편성이 각기 다르다. 이 중 제6번은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다. 곡의 규모가 작고, 연주하기도 비교적 쉽기 때문에 바이올린 초보자들도 즐겨 연주한다. 전형적인 협주곡 형식인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합주부의 음악적 소재가 독주부에서 활용되어 독주 악기와 합주 간의 연관성이 긴밀한 것이 특징이다.

비발디는 독주 악기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협주곡 양식을 정립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작곡가이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계(Le quattro stagioni)〉는 이 형식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사계〉는 1725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에 들어 있는 곡이다. 모두 12번까지 있는데, 이 중 1번에서부터 4번까지가 〈사계〉이다. 〈사계〉를 포함한 12곡은 모두 독주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의 현악 5부를 위해 작곡된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다양한 악기와 기법을 동원해 숲 속의 새소리,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 천둥 번개 치는 소리, 여름 더위에 지쳐 졸고 있는 목동들의 모습, 여름날의 소나기와 폭풍우, 사냥꾼의 나팔소리, 매서운 겨울바람에 떨며 얼음길을 종종거리며 걸어가는 모습 등 사계절의 다양한 풍경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비발디의 협주곡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그의 작품에 표현된 간명한 주제, 명료한 형식, 생명력 있는 리듬과 음악적 아이디어의 논리적 흐름을 열심히 배우고 모방했다.

비발디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집중했지만, 바순, 첼로, 오보에, 플루트, 비올라 다모레, 리코더, 만돌린을 위한 협주곡도 작곡해 협주곡 레퍼토리를 넓혀 놓았다. 1729년에서 1730년 사이에 작곡한 〈플루트 협주곡 제3번 D장조 작품10―3 '방울새'(Flute Concerto in D Major RV 428 'Il gardellino')〉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곡은 독주 플루트와 바이올린 2부, 비올라, 통주저음으로 이루어진 합주부로 구성되어 있다. 1악장 알레그로에서 합주부가 힘차게 주제 선율을 연주하면 독주 플루트가 펼침화음으로 이에 화답한다. 그런 다음 플루트가 트릴과 매력적인 선율을 이용해 새소리를 묘사한다. 2악장에서는 쳄발로 반주에 맞추어 독주 플루트가 아름다운 시칠리아 춤곡풍의 음악을 들려준다. 또한 3악장에서는 합주부가 활기찬 동기를 연주하면 독주 플루트와 제1 바이올린이 새소리를 묘사한 특징적인 음형을 노래한다. 합주부와 독주 플루트가 마치 대화를 하듯 음악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비발디의 성악곡은 양으로 보면 기악곡에 훨씬 못 미치지만 질적으로 상당한 수준을 보여 준다.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가 그중 하나이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가톨릭의 중요한 교회음악 양식 중 하나로 우리말로 '눈물의 성모' 혹은 '슬픔의 성모'라고 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라틴어 텍스트에 곡을 붙인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 기념일 미사,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 그리고 십자가의 길 예절 행렬 때 부르는데, 제목은 노래의 첫 구절인 '비탄에 잠긴 어머니가 서 계셨네(Stabat mater dolorosa)'에서 나온 것이다. 텍스트의 전반부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후반부는 성모 마리아와 고통을 나누려는 인간의 종교적 결의를 그렸는데, 비발디는 기존의 텍스트 중에서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부각시킨 전반부 텍스트에만 곡을 붙였다. 다른 작곡가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독창, 중창, 합창, 오케스트라의 호화 진용을 갖추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토 혼자서 부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죽어 가는 아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비통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걸작이다.

그 밖의 작품으로 12곡의 실내 소나타집, 바이올린 협주곡집 〈라 스트라바간차(La Stravaganza)〉, 바이올린과 오보에를 위한 협주곡집, 소나타집 〈충실한 양치기〉, 합창곡 〈글로리아〉, 모테트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