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향곡 제6번 Op.74 <비창>
이 교향곡은 표제대로 《비창(悲愴)》의 정서를 강하게 나타낸 점으로 특색이 있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의 특징인 선율의 아름다움과 형식의 균형과 관현악 편곡의 교묘한 처리 따위, 뛰어난 점이 그것을 대단히 인상적인 것으로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작품 가운데서가장 유명하고 우수한 것으로, 세계의 교향곡에서도 일류에 자리하는 곡이다. 이 교향곡은 표제악적인 내용을 갖고 있고, 따라서 형식도 고전 교향곡의 형식보다도 제법 자유롭다. 고전시대에서의 전통에 따른 점을 든다면, 제1악장이 느릿한 서주부와 급속한 주부로서 되는 소나타 형식의 곡인 것, 제2악장이 우미(優美)한 곡인 것, 제 3악장이 리듬적으로 활발한 곡인 것 따위인데, 표제악적인 내용 때문에 종래의 전통을 이탈한 점을 든다면, 제4악장이 통례의 급속하고 쾌활한 곡이 아니고, 극히 느린 속도의 영탄적(詠嘆的)인 비통한 느낌의 것인 점, 제2악장이 우미하긴 하나, 느린 속도가 아니고 바른 점, 그리하여 제3악장이 전통의 3박자의 무도 리듬에 의하지 않고, 4박자의 행진곡적 리듬에 의한 점 따위이다. 이 교향곡은 인생에의 공포, 절망, 패배등 모든 인생을 부정(否定)하는 정서를 나타내고 있으나, 표제악적 내용은 그것만으로서 결코 특정한 사건이나 개인의 감정을 묘사하지는 않았고, 인간이 갖는 비창의 정서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곡은 순수한 표제악이라고 볼 수는 없다. 비창의 정서는 누구에게도 공감(共感)을 준다. 이 곡은 그 훌륭한 구성에 의해서, 이 감정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만인의 가슴에 강렬하게 호소하는 것이다.
[작곡의 내력] 차이코프스키의 제4와 제5 교향곡은 전 유럽에 그의 명성을 높혔다. “나는 자기의 창작의 최후를 웅대한 교향곡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불타고 있다.”고 그는 1889년 10월의 편지에 썼다. 이것이 제6 교향곡에의 움틈이었으나, 곧 작곡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1891년 차이코프스키는 미국 연주 여행의 귀로에서 한 교향곡을 썼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찢어 버렸다. 1893년 차이코프스키는 동생 아나톨리에게 “나는 지금 새 곡의 작곡에 몰두하고 있네. 나는 이것을 그만 둘 수가 없다네. 틀림없이 이것은 나의 최상의 작품이 될 걸세.”라고 썼으며, 그 다음날 조카인 다비도프에게 “여행(1892년 12월 파리에) 도중에 새로운 교향곡의 구상이 마음에 떠올랐다. 이번 교향곡에는 프로그램(叙沭的內容)이 있으나, 그것은 누구에게도 수수께끼여서 상상에 맡긴다. 이 프로그램은 전혀 주관적인 것이다. 여행중에 머리 속에서 이것을 작곡하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 돌아와서 이것을 작곡함에 있어서 강한 정열을 갖고 일을 할 수 있었으므로, 제1악장은 4일간도 걸리지 않았고, 다른 악장의 구상도 이미 마음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 형식에는 신기한 점이 여러 가지 있다. 예를 들면, 끝곡은 떠들썩한 알레그로가 아니고, 길게 늘여진 아다지오로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진전이 되지 않았다. 그해 8월에 다비도프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2페이지를 쓰기에 하루 왼종일 걸렸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 곡은 8월 말이나 9월에 완성된 것 같다. 그리하여 그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작품이다.”라고 자주 말했듯이 그 자신의 일대 걸작이 되었다.
[초연과 죽음] 1893년 10월 28일 차이코프스키 지휘로 페티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다. 연주는 잘 되었고, 갈채의 앙코르로 그는 다시 한 번 무대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청중에게는 이 곡이 이해되지 않았고, 갈채는 단순히 대가에의 존경에서 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초연 뒤에 차이코프스키는 동생 모데스트에게 “이 곡은 제6교향곡만으로는 쓸쓸하다.”고 말하자, 모데스트는잠시 생각하여 “트리직(비극적)이 어떨까요?”하고 말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마음에 들지 않아했고, 잠시 뒤에 모데스트는 갑자기 “파테티크(비창)”을 생각해 내어 차이코프스키에게 말했다. “홀륭하다. 모디. 브라보! 파테티크다.” 그리하여 악보 위에 Symphonie Pathetique라고 써서 출판사에 보냈던 것이다. 10월 1일, 그는 요릿집에서 회식하면서 찬물을 마셨다.. 마침 콜레라가 유행중이었으므로 친구들은 말렸으나, 그는 태연했다. 그날 밤 연극 구경을 가서 주연 배우를 찾아가 환담하는 도중 죽음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죽기는 아직 멀었네. 나는 오래 살 것 같으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콜레라에 걸려 눕게 되었고, 병상은 악화되어 절망 상태가 된다. 드디어 한 달 후인 11월 6일 오전 3시에 생애를 마쳤다. 11월 8일 <비창교향곡>은 다시 페테르부르크에서 나프라브닉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청중은 모두 한 음 한 마디를 되씹으면서, 끝악장에서는 흐느껴 우는 사람도 있었다. 차이코프스키가 확신한 대로 사람들은 이때 비로소 이 곡이 그의 일생의 최대 걸작인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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