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가 세르비아인의 흉탄에 쓰러진 것은 1914년 6월27일이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다. 전쟁은 순식간에 확대되어 8월 초에는 드디어 프랑스도 독일과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그 누구보다도 열렬한 애국자였던 라벨은 군대에 들어가려 했지만 군부는 그를 정중히 거부했다. 그 이유인즉, '당신은 예술가이니까 제1선에서 싸우기 보다는 국가를 위해 더 훌륭한 작품을 써주시오'라는 것이었다. 과연 예술의 나라 프랑스가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열의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군부도 드디어 동의하고 그를 간호병으로 채용했다. 그 해 11월부터 <프랑스모음곡>의 작곡에 들어가서 전쟁 중인 1917년에(42세)에 완성되었다. 이것이 <쿠프랭의 무덤>이다. 이 사랑스런 모음곡이 좀처럼 완성되지 못한 것은. 그 뒤 간호병에서 자동차 수송대로 지원해서 수송트럭의 운전수가 되어, 적탄이 날아오는 속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곡명이 <쿠프랭의 무덤>이라고 되어있듯이, 쿠프랭(1688-1733) 시대의 고전모음곡 형태를 빌어서 그 위에다가 당시의 참신한 감각의 옷을 입힌 것이다. 그리고 낱낱의 곡에는 그때 전쟁에서 전사한 그의 친구나 친지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들에게 헌정되었다. 즉 라벨은 이 곡으로써 프랑스의 전통과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용감한 전사들을 기리려고 했던 것이다. 원래 피아노곡으로 만들어진 것을 후에 2번 푸가와 6번 토카타를 빼고 나머지 4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