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그  Grieg, Edvard Hagerup (1843 - 1907) : Norway

-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Op.16

 

그리그는 항구 도시 베르겐 태생으로,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낭만적 국민음악의 작곡가이다. 어릴 때부터 피아니스트였던 모친의 가르침을 받아, 모차르트, 베버, 쇼팽 등의 명작을 사랑했으며, 특히 쇼팽을 깊이 사모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스뷜러는 그를 북유럽의 쇼팽이라 불렀다.

그리그가 국민음악을 뜻하기까지에는 약간의 편력이 있었다. 19세 때 슈만주의 하의 라이프찌히 음악원을 졸업하고, 전통적 기법을 습득하여 귀향한 그는 다시 수업을 위해, 당시 북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코펜하겐으로 가서, 가데(Niels Wilhelm Cade, 1817~1890)에게 사사하였다. 이 곳에서 훗날 아내가 된 니나와 알게 되었으며, 이 무렵까지의 그의 작풍은 상당히 덴마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864년 그가 21세 때의 가을에, 은인이며 명 바이올린 연주자인 올레ㆍ불(Ole Bull, 1810~1880)과 함께 노르웨이 국내를 여행하며, 각지에서 민요를 듣고, 또한 민족주의 청년 작곡가, 노르드라크(Rikard Nordraak, 1842~1866)를 사위어 깊이 깨달은 바 있어, 자기가 나아갈 국민음악에의 길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해, 그는 로마에서 입센과 친교를 맺고, 다시 신념을 굳게 하여 그 후는 고향에서 노르웨이 일색의 연주회를 성공시키기도 하고, 노르웨이 음악 아카데미의 설립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국민음악의 그의 주장이 작품에 구체화된 것은, 니나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시작된 1867년 말의 피아노를 위한 서정 소품집(작품 12) 이후의 일로서, 이 곡에는 많은 노르웨이 민요가 채택되고 있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이 한 곡 뿐이나, 《페르ㆍ귄트》모음곡과 함께 그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한 것으로, 이 곡은 그의 음악적 매력을 유감없이 갖추고 있다. 즉 노르웨이 민요풍의 청순한 가락, 신선한 화성, 경묘한 리듬 등, 소재는 신선(新鮮)하며, 특히 작곡 당시 그의 행복된 여러 사정을 반영하여, 생기 발랄하고 젊은 정열이 넘치고 있다. 거기에다 작곡자 자신이 피아노의 뛰어난 연주자고, 악기의 성능을 마음대로 살려, 자유 분방한 표현을 구사하여, 다채롭고 아름다움을 나타내어, 기교적인 면으로는 리스트와 흡사한 점이 있다.

곡은 3악장으로 이루어지며, 제 2, 제 3악장은 계속하여 연주된다. 악식에 대해서는 재래의 형을 답습하고 있으며, 새로운 맛은 없으나, 세부적으로 여러 가지 창의가 엿보여, 제 3악장은 상당히 자유로운 전개를 보이고 있다. 곡의 바탕음은 낭만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슈만만큼 내연적(內燃的), 사색적(思索的)이 아니며, 쇼팽 만큼 감상적인 것도 아니고, 북유럽의 대자연, 울창한 삼림, 험한 산악에서 자라난 신선하고 색조깊은 정조(情調)를 간직하고 있다.

[작곡의 경과] 1866년 그리그는 23세로 크리스차이나ㆍ필하모니 협회의 지휘자가 되어, 1867년 사촌 동생인 소프라노 가수 니나ㆍ하게루프(1843~1935)와 결혼하였다. 1868년 6월, 아내와 어린 장녀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덴마크를 방문하여 코펜하겐으로부터 1시간 정도의 거리인 쾌적한 교외 소렐래드에 머물러, 풍부한 환경 아래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면서, 수 년간 길러온 국민음악의 이상에 불타면서 여름동안 이 협주곡을 완성시켰다.

이 곡은 완성된 다음 해의 초연에서, 대갈채를 받았으며, 그 때의 피아노 독주가였던 네우파르트(Edmund Neupart, 1842~1888)에게 헌정되었다.

그리그는 후에 리스트의 추천을 받아 급비(給費)를 얻어, 27세 때인 1870년에 로마로 두 번째의 여행을 하여(처음은 1865년 겨울), 당시 59세의 리스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 그는 이 피아노 협주곡을 가지고 갔다. 리스트는 그리그로서도 도저히 불가능한 빠른 솜씨로 처음 대하는 이 곡을 연주하여 크게 칭찬하였으며, 아울러 종래의 방침을 바꾸지 말고 계속 매진하도록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