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opold Godowsky (레오폴드 고도프스키) 1870-1938

   폴란드 태생의 미국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19세기의 피아니스트들이 진지하게 생각해 준 피아니스트로는 피아니스트 중의 피아니스트인 레오폴드 고도프스키가 있다.  키가 작고 살이 포동포동하게 찐데다 둥근 얼굴에 속을 헤아릴 수 없는 슬라브 민족의 눈을 가진 그는 부처님 처럼 보였으며, 그래서 후네커(Huneker)가 그에 걸맞게 <건반의 브라마(Brama-힌두교 최고의 신)>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그를 <왼손의 사도자>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갖춘 테크닉이-스튜디오에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당대 뿐만 아니라 모든 시기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피아니스트적인 기교라고 인정할 정도로 그는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모든 음반이 하나같이 아름답지만 고도프스키의 순수함, 우아함, 관록과 전설적인 피아노 기법을 보여주는 것은 오직 1928년 경에 만든 그리그의 발라드를 녹음한 음반 뿐이다. 청중 속에 있던 모든 전문가들은 그의 연주 효과가 대단한 것을 알았지만, 음악회에서 연주한다는 그 자체가 그를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죠지 버나드 쇼가 이 점을 1890년에 쓴 평에서 지적하고 있다.

 

   "고도프스키는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을 연주했는데, 그 곡을 전혀 아무 어려움도 없는 듯 쉽고 잔잔하게 쳐 나갔다. 속박되어 있는 것 같은 소심증이 마땅히 찬양받아야 할 그의 진가를 발휘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었다...."

 

   고도프스키의 진가를 알고 있는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소심증을 안타까워 하였다. 요셉 호프만이 고도프스키의 집을 나서면서 아브람 샤셍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 당신이 들은 이 연주를 잊지 마시오. 그 소리를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하시오. 이 세상에서 그와 같은 연주는 다시 없을 것이오. 대중들이 오직 팝시(고도프스키의 애칭)만이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비극이오."

 

   음악애호가들에게 고도프스키는 최상의 비범한 인물이었다. 후네커(Huneker)는 고도프스키를 찬양하며

 

   "지성과 감정이 잘 균형잡힌...순수 스타일과 다성음악...피아노 연주에 있어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 내가 아는 한도내에서 피아노 연주사상 쇼팽이래로 그와 같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그의 열 손가락은 독립된 10성부가 되어 옛날 플레밍(Flemings) 음악의 다성부 예술(Polyphonic art)을 창조하고 있다...그는 피아니스트들의 귀감이 되는 피아니스트이며 대다수의 피아니스트들도 이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비록 그의 냉철한 완벽성이 그들에게 수학가 혹은(문제를 해결하려는) 체스 선수를 연상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고도프스키가 사실상 독학으로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는 유태계 부모를 사이에 두고 폴란드에서 태어났으며, 7살 때 작곡을 시작하고, 9살에 음악회에서 연주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교육은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에 관해 전해 오는 얘기에 의하면, 그가 3살 때 군악대가 연주하는 오페라 <마르타>의 발췌곡을 들었는데, 일년 후에 바로 그곡을 피아노로 정확하게 연주했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그동안 그가 한번도 그 곡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피아노 레슨을 받아 본 적도 없었다. 그의 고향 빌나의 음악가들에게서 이따금씩 지도를 받아오다가 7살이 되면서 부터는 부지런히 작곡을 하였다.

 

   고도프스키는 어린 시절에 후견인(그는 아기였을 때 의사인 아버지를 여의었다.)이 그를 상당히 무자비하게 이용하려 했지만, 파인버그에 의해 구제되었다. 파인버그는 쾨니히스버그에 사는 은행가로 고도프스키가 베를린의 고등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었다. 그곳에서는 바길(Woldemar Bargiel)과 루도르프(Ernst Rudoeff)가 고도프스키의 중요한 선생이었다. 요하임도 그의 선생이었다고 한다.

 

   고도프스키는 1884년까지 베를린에 머물러 있다가 벨기에 바이올리니스트인 오데 무신(Ovide Musin)과 더불어 미국 연주 여행에 나섰으며, 유럽으로 돌아와서는 3년간 생상과 친하게 지냈다. 이 위대한 프랑스 음악가가 고도프스키의 단 한 사람의 선생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도프스키 자신은 아마도 자수성가한 음악가라는 자부심 때문이었던지 말년에는 생상의 곡을 무시하였다. 1924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파리로 가서 생상 앞에서 많은 곡을 연주하였다. 그렇지만 나에게 레슨은 해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연주하면 -내 자신의 작곡까지도- '아름다워!', '놀라워!', '나의 친애하는 사람이여, 멋있도다!'라는 같은 종류의 소리를 되풀이해서 말하곤 했다. 물론 진심에서 해준 말이었지만 이 칭찬은 아무런 건설적인 비평이 되어주지 못했다. "

 

   생상 이후 고도프스키는 혼자서 길을 닦았다. 그는 광범위하게 연주 여행을 떠났으며, 미국에서는 가르쳤고 1900년에는 베를린을 정복하였다. 그가 시카고의 평론가인 메튜스에게 자신의 베를린 데뷔에 대해 쓴 장문의 편지는 1900년 12월 24일자로 명기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놀라운 것으로 길지만 인용할 가치가 있다.

 

   "   내가 베를린에 있는 피아니스트와 선생들 사이에 잘 알려진 존재라는 것을 알고 나는 대단히 놀랐다. 하지만 많은 비평가나 음악을 좋아하는 대중들은 나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음악회 전에 나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대성공을 예견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떤 예술가들은 대중에게서 호평을 받지만 비평가로 부터는 매장을 당한다. 또한 어떤 예술가들은 신문 평은 좋지만 대중에게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반유태적인 신문과 대중들도 있다. 이러한 직업적인 시기심 외에 내가 싸워야 할 어려움이 어떠한 것인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음악가들과 음악도들이 나의 음악회를 갈망하며 기다리는 것을 발견한 나의 놀라움을 상상해 보시오. 베토벤 음악회장(Beethoven Hall)은 한다하는 음악인들로 청중석이 꽉차 있었고, 베를린의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음악회에 다 참석해 있었다.

   내가 무대 위에 나타나자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었고, 나는 연주를 시작하기전 여러번 인사를 해야만 했다. 흔하지 않은 행운 덕분에 나는 전연 떨지 않았고, 첫번째 곡인 브람스 콘체르토 B플랫 장조의 1악장을 아주 만족스럽게 연주했다. 대만족은 나에게 그 다음 악장들을 연주하는데 용기를 주었으며, 1악장이 끝난 후의 박수갈채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소리가 굉장했다. 내가 2악장을 시작할 수 있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마지막 악장이 끝난 후 나는 무대위에 여러번 불려 나왔는데 몇 번인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몇 분간의 휴식 후 나는 내가 작곡한 7곡의 쇼팽 페러프레이즈와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를 치러 무대 위에 나왔다. 음악가들과 청중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고 전반적으로 동요가 일었다. 음악회장은 유난히 즐거워 보였고 흥분된 감정에 들떠 있었다. 나는 맨처음 왼손만을 위한 연습곡 Op25-4 a단조를 연주했다. 이 연습곡이 끝난 후의 시끄러운 박수 소리를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기립박수를 보내주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홀이 떠나갈 듯 했다. 그 다음 Op10-11과 Op25-3을 합쳐서 연주했고, Op25-8, Op25-5를 마주르카로, Op10-4, 바디나쥐, Op10-5 그리고 '무도회의 권유'로 끝을 맺었다.

   파데레브스키가 받은 열렬한 열광까지 포함해서 내가 이제껏 목격한 어느 음악회 보다도 가장 성공적인 음악회였다. 나는 이 연습곡을 전부 다시 한 번 칠 수 있었으며 음악회가 너무 길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청중들이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듣고 너무 지친 듯해서 나는 바디나쥐와 마주르카만 다시 들려 주었다. 페러프레이즈들을 연주하고 난 후 몇 번이나 무대에 인사하러 나왔어야 했는지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셀 수 없었다.

   파흐만, 요셉 바이스, 함부르크, 안톤 포에르스터와 같은 피아니스트들과 청중들 전부가 사실인즉 미친 것 같았다. 그들은 맹수처럼 비명을 지르고 손수건을 흔드는 등 .... 나는 차이코프스키를 대단한 기세로 쳐나갔다. 2악장은 그 이상 좋을 수 없었다. 음악회를 끝내면서 나는 생상의 g단조 콘체르토와 스케르쪼와 왼손만을 위한 '흑건 연습곡'을 앙콜곡으로 연주했다. 나는 더 이상 치기를 거절했다. 연주자 대기실에서의 광경은 그것을 지켜본 사람이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오려고 미친 듯이 몰려드는 바람에 나는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 아내와 몇몇 친구만이 무대위의 무대로 통하는 문으로 나에게 올 수 있었다.

모든 평들은 너무 훌륭해서 아무도 나처럼 그렇게 좋은 평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의 성공은 모든 음악가들이 기억하는 한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이었다. 내가 그 성공하는 것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오. 나도 그 성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리하여 고도프스키는 정복자로 베를린에 입성했다. 그곳에는 그의 큰 적수인 부조니가 있었고, 각자는 서로 상대방을 능가하기 위해 그 음악시즌 동안 베를린에서 몇 번씩 음악회를 열곤 했다. 베를린에서 고도프스키와 공부한 적이 있는 노엘 스트라우스는 고도프스키가 리스트 곡만으로 음악회를 열자, 부조니가 리스트 편곡만으로 프로그램을 짜서 대응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고도프스키는 베를린에서 가르쳤고 1904년에서 1914년까지 비엔나에 있는 음악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전쟁이 그를 미국으로 되돌려 보내 그곳에서 정착했다. 1930년 런던에서 음반을 녹음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다시는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고, 1938년 사망하였다.

 

   사람들이 고도프스키를 두고 말할 때 무대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인가? 라는 물음을 자주 한다. 그가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연주하는 곳은 집이었고,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떠나면서 자신들의 재주 없음을 한탄하게 만든 곳도 그의 집이었다. 고도프스키의 테크닉은 영웅적인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는 커다란 음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손의 독립, 고른 손가락, 다성부를 한가닥씩 선명하게 엮어나가는 능력, 피아노를 다루는 전반적인 솜씨면에서 그는 건반악기 역사상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그 자신의 음악은(그는 상당수의 음악을 작곡, 편곡하였다.)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자세하게 수식된데다 내성부가 너무 많이 교차되어 있어서 고도프스키 말고는 아무도 그 곡을 연주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음악의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테크닉이 굉장히 좋은 피아니스트들이 때때로 '박쥐'나 '예술가의 생애'에 쓴 페러프레이즈를 연주해 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의 생존시 사람들은 그가 미래 세대의 피아니스트들을 위한 작곡을 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아직 그 세대는 오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서서히 그 세대가 오고 있다. 아믈랭이 그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장 정교하게 쓴 곡들이 시리즈로 있는데, 쇼팽 에튀드에 부친 53곡의 페러프레이즈가 바로 그것이다. 이 곡들은 아마도 이때까지 씌여진 피아노곡 중에서 가장 연주하기 불가능한 곡들일 것이다. 이 곡들은 엄청나게 힘든 연습곡으로 리스트 조차 꿈꿀수 없을 정도의 높은 수준으로 피아노 테크닉을 올려 놓았다. 고도프스키는 왼손만을 위한 곡(드 파흐만이 좌절당한 '혁명 연습곡'을 포함해서)도 몇 곡 썼다. 또 G플랫 장조로 된 Op10-5(나비)와 Op25-9(흑건)을 바디나쥐(Badinage=농담)이라는 표제 아래 묶은 것처럼 두 곡을 하나로 합치기도 했다. 또 어느 연습곡은 베이스를 오른손으로 멜로디를 왼손으로 옮긴 것도 있다.

 

   고도프스키는 자기가 쇼팽의 연습곡에 손을 대면 많은 음악인들이 항의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쉐레징거(Schlesinger)판 머리말에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26곡의 쇼팽 연습곡에 기초한 53연습곡은 다양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의 기계적, 기교적, 음악적인 기능성을 향상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성음악적이고 복리듬적이며 복다이나믹적인 작품을 다루게 할 뿐만 아니라 피아노 음색에 있어서도 다양성의 기능을 넓히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고도프스키는 이어서 쇼팽의 연습곡을 그렇게 만지는데에 대한 미학적인 정당성을 주장하는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이고 있다. 이 소견들은 페러프레이즈를 모독행위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세대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고도프스키의 음악을 다루는 재주에 경탄해 마지 않는 사람들은 비록 그 숫자는 줄고 있지만 반대파의 아우성을 무시했다. 그리고 고도프스키가 보여준 불후의 천재성, 하나의 연습곡을 다른 연습곡과 결부시키는 다성음악적 재주, 피아노 테크닉이 전부 한결같이 독창적인 점, 다양한 음색을 활용할 수 있는 비범함 등을 지적했다.

   전문적으로 얘기하자면, 그의 작곡 기법은 너무나 초월적인 특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피아노 악기 그 자체를 위한 피아노곡다운 곡을 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도프스키의 페러프레이즈들은 피아노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낭만 다성음악의 치밀함이 갖고 있는 그 논리성(혹 원한다면 비논리성)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리스트 이래로 피아노 악기로서의 특색을 그렇게 잘 살려 쓴 곡은 없었다. 그리고 그 페러프레이즈 곡들이 끔찍하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묘기를 과시하는 곡으로 연주되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다.

 

   고도프스키는 내심 음악을 첫째가는 목표로 삼았던 것인데, 그런점은 구식으로서 오늘날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미학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목표에는 어떤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즉, 피아노 그 자체가 전부이자 끝이고, 한낮 악기이기 보다는 생활방식이며, 페러프레이즈가 음악을 위한 음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많은 리스트의 편곡처럼) 피아노를 위한 음악으로 간주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페러프레이즈 곡들은 20세기에 들어서자 미학상의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이후에는 완전히 잊혀질 상태에 처해 있다. 그러나 아믈랭의 등장으로 다시 고도프스키의 수많은 작품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에 8, 10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수 없다. 단, 일초라도 허비하기가 싫었다. 고도프스키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그에게 경외심을 느낀다. 아마 내가 그와 같은 기교를 달성하려면 500년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 그는 불행했고 강박관념에 시달렸으며 피아노를 떠나서는 비참하였다. 그가 인생을 즐겼는가? 그런 일이 나로 하여금 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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