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열정>

 

베토벤 중기의 대걸작의 하나인 이 곡의 완성된 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그렇게 확실치 않으나, 제1, 제2악장과 제3악장 개시의 부분 스케치는 오페라《피델리오》의 스케치 속에 써 있어, 이 곡이 1804년에 착상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틀러의설로는 1806년의 여름, 베토벤이《피델리오》의 작업이 모두 끝난 뒤, 헝가리의 마르톤바샬에 있는 브른스빅 백작 저택에서 단숨에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리이스가 끝악장에 대하여 말한 바에 의하면, 어느 날 데플링에 베토벤을 방문하여 같이 산택하였을 때, 베토벤은 어떤 악상을 소곤거리거나 고함지르거나 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묻자 베토벤은 최근의 소나타 마지막 악장의 주제라고 답했으며, 집에 돌아오자마자 레슨을 중지하고 피아노에 향하여 열심히 새로운 곡을 계속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이 곡이라는 것인데, 베토벤이 데플링에 머물러 있은 것은 1803년과 그 이듬해로서, 이것은 시기가 약간 빠르다.

결국 1805년 여름《피데리오》가 끝날 즈음에, 이 곡도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805년 4월 18일에 완성을 예정한 편지를 출판사에 보내고 있다.

출판은 늦어져서 1807년 2월에 소나타 제 54번으로 이루어졌다(이 번호에 대해서는 앞의 F장조 소나타 해설용 참조). 베토벤은 그 사이에 초고를 가지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모양으로, 그것을 많은 사람이 보고 갖가지 이설(異說)이 생긴 것이리라. 그 중에서도 비고(Bigot, 라즈모프스키 공의 사서(司書)로서 1804년에 결혼한 아내인 마리(Marie)는 우수한 피아니스트였다. 마리는 하이든, 살리에 베토벤과 교분이 있었을 뿐 아니라, 후년에는 멘델스존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가 전하는 이야기는 사실로서 인정되는 흥미깊은 것이어서 여기에 말해 두겠다. 베토벤은 1806년 가을 슈레젠의 리히노프스키 공의 저택에서 비인에 돌아오는 도중 비에 흠뻑 젖어, 가지고 갔던 소나타의 초고도 젖어버렸다. 돌아온 베토벤은 그 젖은 악보를 비고의 아내 마리에게 보인 즉, 마리는 그 음악에 끌려들어 그것을 완전히 연주해내어 베토벤을 매우 기쁘게 했다고 한다. 자필의 악보는 출판이 끝난 다음 마리에게 헌정하였다.

이 소나타는 대체로 같은 시기에 손대고 있던 c단조의 교향곡 등과 함께,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격렬한 음악이다. 투쟁적인 정열이 열풍처럼 불어대고, 그 한가운데에 엄숙한 안식의 제 2악장이 깊은 표정으로 가로놓여져 있다. 앞뒤의 폭풍우와도 같은 음악이 우리들에게 압도적인 박력으로 덮쳐오는 것에서, 후에 함부르크의 출판사 크란쯔에 의하여《열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그것이 그대로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면, 리쯜러의 말을 빌리면 “다만 듣는 사람으로서 냉정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이 작품에서도 거칠게 광희(狂喜)하는 패시지나 격렬하게 동요하는 가락을 지배하고 있는 통어력(統御力)을 느낄 수 있으리라”. 즉 이 곡에는 끓어오르는 것 같은 감정이 있고, 음악은 사납게 물결치고 있는데, 그러나 이 음악적인 구성은 조그만치의 틈도 없이, 터질 듯한 내용이 훌륭한 음악적 조형에 의하여 참으로 하나의 세계로 영원화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속에는 평안한, 또한 침통한 측면까지 포섭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곡은 보통이 넘는 고도의 연주 기술을 필요로 하나 오히려 그 일면으로는 금욕적인 재현 정신까지 필요하다는 것이 된다. 고금의 소나타 가운데서 이 곡이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의 어려움에 누구나가 한 번은 도전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나기 때문이리라.

 

[헌 정] 브른스빅 백작(Franz de Paula Brunsvik, 1777~1849). 백작은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 특히 첼로를 잘 연주하였고, 베토벤의 음악에는 마음으로부터 경도(傾倒)하고 있었던 것같다. 백작에게는 세 자매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테레제(Therese, 1775~1861)는 예의 초상을 베토벤이 마지막까지 비장하고 있던 상대였으며, 요제피네(Josephine, 1779~1821)는 다임 백작과 결혼했으나, 곧 사별, 그리하여 베토벤과 열렬한 교제와 편지의 주고받음이 있었으나, 뒤에 슈타케르네르크 백작과 결혼했다. 이 일가는 1799년 이래 모두 베토벤과 깊이 사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베토벤의 생애에 큰 의미를 갖고 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