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op.27-2 <월광>

 

1801년에 작곡됨. 음악이 그것에 주어진 속칭(俗稱) 때문에 통속화된다는 것은 그 예가 적지 않으나, 그 가운데서도 이 소나타만큼 속칭에 비해서 유명하게 된 곡은 없으리라.《월광》이라는 이름을 렐시타브(Ludwig Rellstab, 1799~1860)가 이곡의 제 1악장을형용하여 “스위스의 루쩨른 호반의 달빛에 어린 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와도 같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렐시타프의 생년에서 추정컨대《월광》의 속칭이 일반에게 일반화된 것은 출판된 후 제법 뒤의 일인데, 이 곡은 처음부터 무척 인기가 있었던 모양으로, 베에토오벤은 그것을 조금 괴롭게 생각한 것 같다. 공상을 초래하는 요소가 매우 강한 것이 인기를 부르게 된 원인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월광》이외에 갖가지 독창적인 해석이 행해져 왔다.

이 소나타도 베토벤 자신의 명명(命名)은 작품 27의 1과 같이 <환상곡풍의 소나타>이다. 제1악장은 여기서도 소나타 형식을 버리고 환상적, 즉흥적인 부드러운 서정에 철저하여, 제2악장에서 그 기분이 전환되어, 이 소나타의 중심(重心)인 제3악장에 도달한다. 이 제3악장의 정열의 분류(奔流)는 그 즈음의 피아노 소나타에는 그 유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격렬한 것이어서, 또한 극히 훌륭한 구성의 소나타 형식이다.

이 제1악장의 명상이나 제3악장의 격정을, 당시 베토벤의 연애 사건, 귀의 질환, 그리고 1802년의 “하일리겐시타트의 유서”에 연관되어 가는 비극과 맺어서 생각해 봄도 가능하나, 그와 같은 구체적인 것에 관계되는 재료는 본디부터 하나도 없다.

 

[헌 정] 백작 영양 줄리에타ㆍ귀차르디(Giulietta Guicciardi, 1784~1856)에게 헌정되었다. 베토벤은 이 14살이나 연하의 여성과 1800년에 브르스빅 가(家)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 해에 줄리에타는 15세의 젊음으로 비인에 나와 베토벤의 제자가 되었다. 그녀의 사촌이 되는 테레제ㆍ폰ㆍ브르스빅도 또한 베토벤에게 피아노의 교습을 받고 있었다. 베토벤은 이 매력적인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1801년 11월 16일부의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이번 변화는 한 귀엽고 매력 넘치는 소녀 때문입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나 또한 그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2년만에 행복한 순간이 찾아 왔습니다. 결혼하여 행복하게 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 신분의 차이 때문인지 이 연애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1803년 11월에 귀차르디는 갈렌베르크(Wenzel Robert Gallenberg, 1783~1839) 백작과 결혼하여, 곧 이어 이탈리아로 떠나고 말았다. 후일담이 되지만, 1823년 베토벤은 당시 케르트너 극장의 악보 관리 주임을 하고 있던 갈렌베르크에게서 오페라《피델리오》의 악보를 빌려고 제자인 신틀러를 보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베토벤은 처음에 귀차르디에게 G장조의 론도 작품 51의 2를 보낼 생각이었으나, 이것은 라히노프스키 백작의 딸 헨리에테(Henrreitte Lichonwsky, 카를ㆍ리히노프스키 백작의 누이동생)에게 증정하게 되어, 예정을 변경하여 이 올림다단조 소나타를 귀차르디에게 돌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헌정은 소위 틈을 메우는 것이 되어, 이 곡의 특히 제3악장의 격렬함을 귀차르디에게 대한 직접적인 애정의 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적어도 지나쳤다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