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루트비히 판 (1770-1827) Ludwig Van Beethoven                    

음악의 성인 - 악성(樂聖)

 

출생과 환경

1770년 독일 본에서 출생
아버지는 궁정악단의 테너 가수였다.
당시에 모차르트의 신동 이야기가 화제여서 아버지 요한은 베토벤을 제2의 모차르트로 만들기 위해 5세인 베토벤에게 피아노(쳄발로)를 가르쳤다.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진 베토벤이었지만 조숙하지 못해 고된 연습을 계속하여 8세 때 피아노 연주 공연을 하였고 10세 때 작곡을 시작하였다

 

   베토벤은 몇몇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1787년에는 빈에 가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다가 1792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 곳이 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셴크 ·알브레히트베르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1796년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하고, 1800년에는 《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제2교향곡》(1802), 오라토리오 《감람산상(橄欖山上)의 그리스도》(1803), 그리고 1804년에는 《제3교향곡(영웅교향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1805년 오페라 《피델리오》의 초연에 실패하고, 이듬해 이를 손질하여 재연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로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814년의 일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출판사가 앞을 다투어 간행하였다. 출판에서의 보수와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후원자로서 특히 유명한 귀족은 루돌프대공(大公), 롭코비츠공작, 킨스키공작 등이었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劇詩)로 《에그몬트》를 작곡하였다. 그 후에 유명한 《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여성에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특히 《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 《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 《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 《바이올린협주곡》 (3곡, 1806), 피아노곡 《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 등이 유명하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親知)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筆談)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연주회 횟수도 줄었고, 빈에서는 보다 가벼운 음악이 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일련의 창작활동은 1817년에 가장 저조했으나, 그 이후 다시 힘찬 작곡활동을 계속하여 뛰어난 대작들을 내놓았으며, 루돌프대공에게 바친 《장엄미사곡》(1823)과 합창을 포함한 《제9교향곡》(1824)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장례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2만을 넘는 시민들이 참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고전파(古典派)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또한 그의 손으로 낭만파에의 이행(移行)도 준비되었다.

   본 시절에는 만하임악파의 영향 아래 습작적인 작품을 썼으나, 벌써 이때부터 개성적인 특징이 엿보였다. 1800년 전후에는 특히 하이든에게 받은 영향을 나타내면서도 개성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을 거쳐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를테면 정적(靜的)인 고전성(古典性)에 비하여 베토벤의 작품은 동적인 다이내믹한 힘을 특징으로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강고한 형식감(形式感)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인 스타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후기의 창작활동은 중기에 비하여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신비스러울 정도의 감동적인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낭만파의 초기의 대표자들인 베버나 슈베르트의 활동과도 겹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작품의 특징

   귀의 통증으로 자살을 결심하여 유서를 제자에게 남기기도 했던 베토벤은 자살로서 자신의 삶과 음악을 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유서를 쓰는 동안 나락 깊숙이 빠져있던 비참한 감정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죽음이 자신을 막을 때까지 신이 부여한 사명을 쫓아 인류를 위해 창작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의 작곡은 이제까지의 것과는 전혀 달라졌다 전통적인 형식보다는 자유롭게 표현된 그리고 단순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아닌 강렬하고 웅대한 힘의 표출이 넘치고 있었다. 그의 음악은 정열과 힘이 넘치면서 드높은 기상과 진지함을 띠고 있다. 베토벤은 오페라를 제외한 전 영역에 걸쳐 많은 곡을 남겼다. 특히 베토벤 음악의 진수는 교향곡 9곡에 물씬 배어있다. 교향곡 제1번은 30세 때 만들었는데 내용에 깊이가 있으며 제3번 영웅에 이르러서는 독창적인 품격이 크게 비약하였다. 이 곡은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한 곡이었다. 교향곡에 웅대한 낭만주의를 가미한 선구적 작품으로 경묘한 스케르초가 잘 어우러져 가히 교향곡 사상 금자탑을 세운 작품이다. 제5번 운명은 열정적이고 화려한 표현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제6번 전원은 전원 생활의 추억이 묘사된 평화와 감사의 정이 풍기는 목가적인 노래이다. 제9번 합창은 그의 평생을 결산하는 대작으로 평가된다. 실러의 환희에 합창을 붙인 마지막곡이 유명하며 성악과 기악을 교향곡에 함께 도입하여 낭만주의 교향곡 역사에 새로운 발판을 마련한 명작이다.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바흐의 48곡의 평균율 피아노곡집을 구약에 비교하여 '피아노 음악의 신약성서'로 불릴만큼 뛰어난 걸작이 많다.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절망의 실의 속에서 굴하지 않고 예술 속에 자신의 혼신을 다해 위대한 음악을 후세에 남긴 거장 베토벤의 인간승리에 질풍노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존경의 침묵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