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세 때 삼촌의 개인 악단 연주를 듣고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18~2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하였고, 존 필드와 찰스 마이어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1824~28년 체신부에서 일하였으나 관리로서는 너무 게을렀고 야심이 없었으며 취미로 노래와 실내악을 작곡하였다. 이탈리아에 3년 동안 있으면서 벨리니와 도니체티에 빠졌지만 결국 향수병에 걸려 '러시아적인' 곡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6달 동안 베를린에서 지크프리트 덴에게 열심히 작곡을 배웠고 거기서 〈2개의 러시아 주제에 의한 교향곡 Sinfonia per I'orchestra sopra due motive russe〉(1834)을 쓰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러시아로 돌아와 결혼하였고,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 Life for the Tsar〉(혁명 뒤 〈이반 수사닌 Ivan Susanin〉으로 제목이 바뀜)을 작곡하는 데 전념하였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높여준 이 오페라는 183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앞에서 공연되었다. 이 시기에 글린카는 가장 뛰어난 노래들을 작곡하였고 1842년에 2번째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and Lyudmila〉를 공연하였다. 동양의 환상적 주제와 독창적인 선율의 이 오페라는 리스트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지만 황제와 대중에게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에 불만을 느끼고 결혼생활도 깨지자 1844년 러시아를 떠났다. 1845년 파리에서 2편의 그의 오페라 발췌곡들이 베를리오즈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지휘로 연주되는 것을 들으면서 만족했는데, 이는 서방에서 가진 러시아 음악의 첫 연주였다.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가 1847년 5월까지 2년 동안 머물면서 화려한 카프리초에 의한 〈호타 아라고네사 Jota aragonesa〉(1845)·〈마드리드의 여름밤 추억 Summer Night in Madrid〉(1848)이라는 2곡의 '스페인 서곡'에 쓸 자료들을 모았다. 1852~54년 크림 전쟁이 터져 다시 러시아로 돌아올 때까지, 주로 파리에서 살았다. 그뒤 자신의 음악과 사교생활, 연애에 대한 재미있는 회고록(1887 출판)을 썼는데, 이 책에는 게으르면서도 붙임성있고 신경쇠약 증세가 있는 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알려진 마지막 작품은 알렉산드르 2세의 대관식 무도회를 위한 〈축전 폴로네즈 Festival Polonaise〉(1855)이다. 글린카는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음악애호가로 알려졌으며 몇 안되는 그의 작품은 모두 귀중한 후기 러시아 음악의 토대로 인정받는다.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서정적 멜로디와 다양한 색채의 관현악법을 보여주며, 발라키레프, 보로딘,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자신들의 양식을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글린카의 관현악곡 〈카마린스카야 Kamarinskaya〉(1848)가 러시아 교향악의 바탕을 마련했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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