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지휘자. 슈포어는 생전에는 베토벤을 능가하는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받았으며, 이탈리아의 파가니니와 견줄 만한 연주자로도 꼽혔다. '독일에는 슈포어, 이탈리아는 파가니니' 라고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연주자였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과 체계적인 음악이론을 공부한 탓으로 바이올린 연주자로서의 그의 데뷔는 화려하였으며, 또한 활동도 여러 방면에 걸쳐 눈부셨다. 루이 슈포어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파가니니와는 정반대로 바이올린의 참다운 아름다움을 기교가 아닌 서정성에서 찾으려 하였으며, 모차르트적 양식에 몰두하여 애수가 깃든 감미로운 선율을 사용하는 음악적 특징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루이스 슈포어(Louis Spohr)는 1784년 북부독일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에서 태어났다. 슈포어는 모차르트의 악보를 연구하면서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15세 때에 브라운슈바이크(Karl Wilhelm Ferdinand of Brunswick)공작의 궁정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연주활동을 시작하였다.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3년간의 연주활동후, 1802년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후원으로 당시 러시아의 고도 상트 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프란츠 에크(Franz Eck)에게 바이올린을 비롯한 음악교육을 일년동안 받았다. 1804년 12월 라이프치히 콘서트에서 당대 영향력있던 음악 비평가 프레드릭 로홀리츠(Friedrich Rochlitz)는 슈포어의 연주뿐만 아니라 작곡실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독일전역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05년부터 1812년까지 독일 튀링겐주(州) 고타(Gotha)의 궁정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맡았으며, 그 곳에서 궁정 오케스트라 가수의 딸인 18세의 하프연주자이던 도레트 쉬들러(Dorette Scheidler)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1813-1815년까지 슈포어는 'Theater an der Wien'(오스트리아 빈 시내에 위치한 '빈에 있는 극장'이란 이름의 극장)에서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거기서 베토벤과 친분을 쌓았다. 1822년 부터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추천으로 독일 중부의 카셀에서 궁정 음악감독으로 재직하였으나, 말년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급진주의를 신봉하게 되어 후원자였던 헤센 카셀 선제후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었고, 1857년 해고당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왼손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당대의 진보적인 작곡가들에게는 반대하였으며(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작품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후기작품을 싫어했다.), 특히 루이 슈포어는 1808년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첫 연주를 '굉음과 천박함의 야단법석'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The Flying Dutchman>, <탄호이저, Tannhauser>를 지휘했다. 루이스 슈포어는 베버나 슈베르트보다 일찍 태어났지만 슈만,·멘델스존의 시대에도 음악계의 원로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었다. 시대적으로는 고전주의에 가깝지만 그의 후기 작품은 완전히 낭만시대 원숙기에 해당한다. <바이올린 협주곡>과 <클라리넷 협주곡> 등 현재도 많은 레파토리들이 사랑받고 있지만, 사실은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다는 것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동시대의 베토벤과 같이 9곡의 교향곡(제10번도 미완성)을 만들었으며, 그의 모든 교향곡들은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베토벤이 사망한 이후에는 당대 유럽 최고의 교향곡 작곡가로 군림했으며, 베토벤의 영향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면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노선을 동시에 추구했던 이 작곡가만의 독창적 음악 세계가 작품속에 펼쳐져 있다. 9곡의 교향곡 가운데 교향곡 4번 <소리의 봉헌, Die Weihe der Tone>이 가장 성공을 거두었다. 슈포어는 19세기 독일뿐만 아니라 초기 낭만파의 기악곡 작곡가로서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있다. 오페라분야에서도 <파우스트>, <예손다>등의 작품을 작곡하여 베버와 더불어 독일 국민오페라 성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초기 독일 낭만파 성립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실내악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한 작곡가로서, 바이올린 연주에 있어서 여러 가지 기교적인 개혁을 시도했던 연주가로서 많은 음악적 업적을 이룩한 사람이었다. 지휘자로서는 1822년 이후 카셀의 궁정악장직에 있으면서 지휘봉의 채택을 비롯하여 새로운 지휘법을 실행에 옮겼다. 1949년 이후 카셀에서 그의 작품 선집이 출판되었으며, 1954년 그곳에서 슈포어 음악을 기리기 위한 슈포어 협회가 결성되었다. 저서에 [바이올린 교칙(敎則)](1831)이 있고, 흥미 있는 자서전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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